카를로스 3세 (나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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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로스 3세는 1387년부터 1425년까지 나바라 왕국의 왕이자 에브뢰 백작이었다. 그는 프랑스 카페 가문의 방계인 에브뢰 가문 출신으로, 나바라의 샤를 2세와 프랑스 공주 발루아의 조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카스티야 공주 레오노르와 결혼하여 여섯 명의 딸과 두 명의 아들을 두었지만, 아들들은 모두 요절했다. 그는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프랑스, 카스티야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고딕 양식의 건축물을 짓는 등 예술을 후원했다. 1425년 사망했으며, 그의 딸 블랑슈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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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3세 (나바라) | |
---|---|
기본 정보 | |
이름 | 카를로스 3세 |
원어 이름 | Karlos (바스크어) Carlos (스페인어) |
칭호 | 나바라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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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 | |
계승 | 나바라 국왕 |
선임자 | 카를로스 2세 |
후임자 | 블랑카 1세와 후안 2세 |
통치 기간 | 1387년 1월 1일 – 1425년 9월 8일 |
가문 | |
왕가 | 에브뢰 가문 |
아버지 | 카를로스 2세 |
어머니 | 잔 드 발루아 |
배우자 | 레오노르 데 트라스타마라 (1375년 결혼, 1416년 사망) |
자녀 | |
자녀 | 후아나, 푸아 백작 부인 블랑카 1세, 나바라 여왕 베아트리스, 라 마르슈 백작 부인 이사벨, 아르마냐크 백작 부인 사생아 란셀, 팜플로나 총대리 |
출생과 사망 | |
출생일 | 1361년 7월 22일 |
출생지 | 망트, 프랑스 |
사망일 | 1425년 9월 8일 (64세) |
사망지 | 올리테 궁전, 나바라 |
매장지 | 팜플로나 대성당 |
2. 출생과 초기 생애
에브뢰 가문 출신으로, 프랑스 왕가인 카페 가문의 방계 가문인 샤를 3세는 나바라의 샤를 2세 국왕과 프랑스 공주 발루아의 조안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었다. 1361년 7월 22일, 아버지의 프랑스 북부 영토 중심지인 망트에서 태어났다.[1] 그의 부모는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의 1차전 (1337–1360) 동안 에브뢰 백작령과 기타 봉토를 관리하며 그곳에서 오래 머물렀다.[2]
1361년 11월, 샤를 2세는 나바라로 돌아갔고, 아내와 아들은 프랑스에 남겨두었다. 1363년 1월, 조안 여왕이 나바라로 이동할 차례가 되자 샤를은 아버지의 누이자 외증조부인 프랑스의 필리프 6세의 미망인인 블랑슈 숙모에게 맡겨졌다. 1365년 12월, 샤를은 어머니와 재회했고, 이듬해 8월 처음으로 아버지의 왕국에 발을 들였다.[2]
샤를의 부모는 프랑스 봉토와 이베리아 왕국을 번갈아 오갔다. 1369년 아버지의 부재 동안, 샤를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왕국의 부관으로 불렸다.[2]
2. 1. 가문 배경
에브뢰 가문 출신으로, 프랑스 왕가인 카페 가문의 방계 가문인 샤를 3세는 나바라의 샤를 2세 국왕과 프랑스 공주 발루아의 조안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었다. 1361년 7월 22일, 아버지의 프랑스 북부 영토 중심지인 망트에서 태어났다.[1] 그의 부모는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의 1차전 (1337–1360) 동안 에브뢰 백작령과 기타 봉토를 관리하며 그곳에서 오래 머물렀다.[2] 1234년 이래로, 나바라 왕국은 프랑스 출신 군주들이 통치해 왔으며, 이들은 왕국의 행정을 개혁하고 국제적 위상을 높였으며 군주의 지위를 강화했다.[3] 그러나 프랑스 내 영토를 선호하여 왕국을 오랫동안 비우면서 이베리아 주민들 사이에서 우려를 낳기도 했다.[4]1361년 11월, 샤를 2세는 나바라로 돌아갔고, 아내와 아들은 프랑스에 남겨두었다. 1363년 1월, 조안 여왕이 나바라로 이동할 차례가 되자 샤를은 아버지의 누이자 외증조부인 프랑스의 필리프 6세의 미망인인 블랑슈 숙모에게 맡겨졌다. 샤를은 1365년 12월 어머니가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재회했고, 이듬해 8월 샤를은 처음으로 아버지의 왕국에 발을 들였다.[2]
샤를의 부모는 가족의 프랑스 봉토와 이베리아 왕국을 반복해서 오갔다. 1369년 아버지의 부재 동안, 샤를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왕국의 부관으로 불렸다.[2] 나바라는 샤를 2세 국왕이 장인인 프랑스의 장 2세와 처남인 프랑스의 샤를 5세와 샴페인 백작령과 심지어 프랑스 왕국에 대한 조상 대대로의 권리, 그리고 조안 여왕의 지참금을 놓고 벌인 갈등으로 인해 큰 대가를 치렀다.[5] 이러한 시기에 중세 후기 위기로 인해 악화된 상황은 소빙기에서 질병, 식량 부족까지, 당시 유럽 전역에서 흔히 발생했던 문제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4] 조안 여왕은 1373년 11월 프랑스 국왕인 오빠에게 외교 임무를 수행하러 갔다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2]
2. 2. 유년 시절
에브뢰 가문 출신으로, 프랑스 왕가인 카페 가문의 방계 가문인 샤를 3세는 나바라의 샤를 2세 국왕과 프랑스 공주 발루아의 조안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었다. 1361년 7월 22일, 아버지의 프랑스 북부 영토 중심지인 망트에서 태어났다.[1] 그의 부모는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의 1차전 (1337–1360) 동안 에브뢰 백작령과 기타 봉토를 관리하며 그곳에서 오래 머물렀다.[2] 1234년 이래로, 나바라 왕국은 프랑스 출신 군주들이 통치해 왔으며, 이들은 왕국의 행정을 개혁하고 국제적 위상을 높였으며 군주의 지위를 강화했다.[3] 그러나 프랑스 내 영토를 선호하여 왕국을 오랫동안 비우면서 이베리아 주민들 사이에서 우려를 낳기도 했다.[4]1361년 11월, 샤를 2세는 나바라로 돌아갔고, 아내와 아들은 프랑스에 남겨두었다. 1363년 1월, 조안 여왕이 나바라로 이동할 차례가 되자 샤를은 아버지의 누이자 외증조부인 프랑스의 필리프 6세의 미망인인 블랑슈 숙모에게 맡겨졌다. 1365년 12월, 샤를은 어머니가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재회했고, 이듬해 8월 샤를은 처음으로 아버지의 왕국에 발을 들였다.[2]
샤를의 부모는 가족의 프랑스 봉토와 이베리아 왕국을 반복해서 오갔다. 1369년 아버지의 부재 동안, 샤를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왕국의 부관으로 불렸다.[2] 나바라는 샤를 2세 국왕이 장인인 프랑스의 장 2세와 처남인 프랑스의 샤를 5세와 샴페인 백작령과 심지어 프랑스 왕국에 대한 조상 대대로의 권리, 그리고 조안 여왕의 지참금을 놓고 벌인 갈등으로 인해 큰 대가를 치렀다.[5] 이러한 시기에 중세 후기 위기로 인해 악화된 상황은 소빙기에서 질병, 식량 부족까지, 당시 유럽 전역에서 흔히 발생했던 문제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4] 조안 여왕은 1373년 11월, 프랑스 국왕인 오빠에게 외교 임무를 수행하러 갔다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2]
3. 결혼과 가정 문제
1375년 카를로스 3세는 카스티야 왕 엔리케 2세의 딸 레오노르와 결혼했다.[1] 슬하에 6명의 딸과 2명의 아들을 두었지만, 아들들은 모두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1]
카를로스 3세와 레오노르 사이에는 불화가 있었는데, 역사학자 엘레나 우드에이커는 카를로스 3세의 사생아들 때문에 발생했다고 추정한다. 레오노르는 자신의 딸들이 왕위를 계승할 권리가 카를로스 3세의 사생아 아들인 란슬롯에 의해 위협받을 것을 염려했다.[1]
1390년 카를로스 3세는 레오노르와 화해하기 위해 맏딸 후안을 나바라로 소환하여 왕위 추정 상속인으로 선서하게 하는 등 여러 조치를 취했다.[1] 레오노르는 1394년 11월 투델라에서 카를로스 3세와 재회했다.[1]
1403년 레오노르의 대관식 이후에는 부부 사이에 다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카를로스 3세는 프랑스 봉토를 방문하는 동안 왕국의 섭정을 레오노르에게 맡겼다.[1]
3. 1. 카스티야와의 결혼 동맹
1375년 5월 27일, 스페인 소리아에서 카를로스는 아버지들 간의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해 엔리케 2세 왕의 딸인 레오노르와 결혼했다. 카를로스와 레오노르 모두 결혼 당시 10대 초반이었다. 레오노르는 카스티야에 머물렀고, 카를로스는 나바라에 있지 않거나 파리에서 프랑스 왕실을 대표하지 않을 때 그녀를 방문했다.카를로스와 레오노르의 첫 아이는 1382년 11월 카스티야에서 태어난 후아나라는 딸이었다. 마리는 1383년 또는 1384년에, 블랑슈는 1385년 8월에 카스티야에서 태어났다. 다음 해에 쌍둥이 딸이 태어났지만, 베아트리스라는 이름의 한 명만 유아기를 넘겨 생존했다.
카를로스는 엔리케 2세의 딸 레오노르와 1375년에 결혼하여 슬하에 6명의 딸과 2명의 아들을 두었지만, 아들들은 모두 요절했다.[1]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블랑슈 | 1385년 | 1441년 | 나바라 여왕, 아라곤 왕자 후안 (후의 후안 2세)과 결혼. |
후아나 | 1386년 | 1413년 | 푸아 백작 장 1세와 1402년에 결혼 |
마리아 | 1388년 | 1425년 | |
마르가리타 | 1390년 | 1425년 | |
베아트리스 | 1392년 | 1415년 | 라 마르슈 백작 자크 2세와 1406년에 결혼 |
이사벨 | 1395년 | 1435년 | 아르마냐크 백작 장 4세와 1419년에 결혼 |
카를로스 | 1397년 | 1402년 | 비아나 공 |
루이스 | 1402년 | 비아나 공 |
3. 2. 부부 갈등과 화해
1375년 5월 27일, 스페인 소리아에서 카를로스는 아버지들 간의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해 엔리케 2세 왕의 딸인 레오노르와 결혼했다. 카를로스와 레오노르 모두 결혼 당시 10대 초반이었다. 카를로스 3세 치세 초기에는 아내 엘레아노르와의 관계 악화로 어려움을 겪었다. 엘레아노르와 딸들은 카를로스가 즉위하자 나바라로 왔지만, 엘레아노르는 곧 병을 앓게 되었다. 건강이 좋아지자 카스티야로 돌아가 딸들을 데리고 갔다. 카를로스가 보낸 외교 사절단에도 불구하고 그 후 7년 동안 돌아오지 않아, 남편과 오빠인 카스티야 왕 후안 1세 사이의 관계가 나빠졌다. 후안 1세가 엘레아노르가 "중대한 의무"를 저버렸다고 분노하자, 엘레아노르는 카를로스가 자신을 제대로 맞이하지 않고 합당한 대우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후안 1세 치세의 연대기에 따르면, 엘레아노르는 카를로스가 자신을 독살하려는 시도로 유대인 의사에게 약초를 받도록 강요했다고 비난하기까지 했다.역사학자 엘레나 우드에이커는 카를로스와 엘레아노르의 불화가 그의 사생아들 때문에 발생했다고 추정한다. 엘레아노르는 나바라에 도착했을 때, 카를로스의 네 명의 정부와 여섯 명의 사생아가 그들의 측근과 함께 궁정에 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엘레아노르는 사생아가 ''푸에로스''에 의해 왕위 계승에서 제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딸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을 권리가 그의 사생아 아들인 란슬롯에 의해 위협받을 것을 염려했던 것으로 보인다.[1]
엘레아노르와 여전히 소원한 상태에서, 카를로스는 1390년에 혼자 대관식을 치렀다.[1] 그해부터 카를로스는 결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취했는데, 그 첫 번째는 엘레아노르에게 자신의 결혼으로 낳은 자녀가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는 것을 확신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맏딸 후안을 나바라로 소환하여 왕위 추정 상속인으로 선서하게 했다. 나바라 귀족과 카스티야 사절이 참석한 이 행사는 7월 25일에 열렸다. 엘레아노르는 이것만으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오빠 후안의 죽음과 조카인 엔리케 3세의 즉위는 그녀의 입장에 덜 동정적이어서 그녀에게 타협을 강요했다. 그녀는 안전에 대한 추가적인 확신을 요구했고, 카를로스는 이에 따라 카스티야 대표 앞에서 십자가에 맹세하며 "그녀를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거나 붙잡거나, 그녀가 죽거나 불구로 되거나 붙잡히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모든 힘을 다해 여왕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할 것"이고, "다른 모든 면에서 선량한 남편이 아내를 대하듯이 그녀를 대할 것"이라고 맹세했다. 그 후 엘레아노르는 나바라로 돌아와 1394년 11월 투델라에서 카를로스와 재회했다.[1]
그들의 화해 직후, 카를로스와 엘레아노르는 1396년 7월에 또 다른 딸 이사벨을 낳았다.[1] 그해 9월, 카를로스는 다섯 딸 모두의 왕위 계승 권리를 확인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아들, 1397년 6월 카를로스와 1402년 루이의 출생은 왕과 여왕에게 큰 승리였다. 어린 카를로스는 왕위 추정 상속인으로 확정되었지만, 그와 루이는 모두 1402년에 사망했다.[1] 왕실 부부는 다음 해에 또 다른 딸 마가렛을 낳았고, 카를로스는 적어도 1412년까지 엘레아노르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을 희망을 품었다.[1] 왕과 여왕은 1403년 엘레아노르의 대관식 이후에는 다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1] 카를로스는 프랑스 봉토를 방문하는 동안 왕국의 섭정을 그녀에게 맡겼다.[1]
4. 나바라 왕 즉위와 통치
카를로스 3세는 1387년 아버지 카를로스 2세가 사망하면서 나바라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아버지의 통치 기간 동안 잃었던 국위 회복과 국내 기반 정비에 힘썼다.
예술을 사랑했던 카를로스 3세는 프랑스에서 화가와 건축가를 초청하여 수도 팜플로나와 교외의 올리테에 고딕 양식 건물을 지었다. 팜플로나 대성당을 개축했고, 올리테 왕궁을 대대적으로 개수하여 여러 개의 탑과 정원을 갖춘 왕가의 휴식처로 만들었다. 1423년에는 팜플로나 자치체의 분쟁에 개입하여 3개의 자치체를 통합, 팜플로나를 하나의 행정 기관으로 만들었다. 그 외에도 복잡한 나바라의 법률을 수정하여 1418년에 발포하거나, 귀족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등 귀족 위주의 정책을 펼쳤다.[4]
만년에는 후계자 선정에 어려움을 겪었다. 아들이 요절했기 때문에 장녀 블랑카(후의 블랑카 1세)를 후계자로 정하고, 아라곤의 왕자 후안(후의 후안 2세)과 1419년에 결혼시켰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손자 카를로스에게 비아나 공작위를 수여하여 왕위 계승자로 결정했다. 한편, 후안에게는 결혼 조건으로 나바라인 가신만 허용하고, 나바라 토지를 함부로 분배하는 것을 금지했다.
1425년 카를로스 3세가 사망하고, 블랑카 1세와 후안 부부가 나바라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1441년 블랑카 1세가 사망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블랑카 1세는 유언으로 카를로스를 나바라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지만, 후안 2세는 이에 반대하고 자신이 단독으로 나바라를 통치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반발한 카를로스가 반란을 일으켜 부자간의 심각한 대립, 즉 나바라 내전이 발발했다.[5]
4. 1. 즉위 초기
카를로스 3세는 1387년 1월 1일 부친의 죽음으로 나바라의 왕이자 에브뢰 백작이 되었다.[1] 같은 해 그는 카스티야로부터 나바라의 마지막 카스티야 점령 지역을 회복했다.[2]카를로스 3세는 아버지의 통치 기간 동안 잃었던 국위 회복과 영내 기반 정비에 힘썼다. 외교에서는 대립 관계에 있던 프랑스, 카스티야와의 관계 개선에 노력했고, 카스티야와는 엘레오노르 공주와의 결혼으로 손을 잡았으며,[1] 1404년에 프랑스 왕가(발루아 왕조)와의 긴장의 원인이었던 노르망디 지방의 에브뢰와 아브랑슈를 누무르 공령과 교환하고, 셰르부르와 샹파뉴의 권리를 연금과 교환하여 프랑스와의 관계를 개선했다.[2]
4. 2. 외교 정책
카를로스 3세는 외교에 뛰어났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나바라가 누린 평화와 번영은 이베리아와 남부 프랑스의 귀족 및 통치자들과 맺은 혼인 동맹 덕분이었다. 1396년에서 1406년 사이에 그는 두 명의 누이와 세 명의 적법한 딸들의 결혼을 주선했다. 그의 사생아들은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나바라 귀족과 결혼했다. 카를로스는 누이 조안의 브르타뉴 공작 존 4세와 잉글랜드 왕 헨리 4세와의 연이은 결혼과 같이 그가 주선하지 않은 연합으로부터도 큰 이익을 얻었다. 조안이 1402년 잉글랜드 여왕이 되자 카를로스는 그녀에게 필사본 ''잉글랜드 왕의 대관식, 성유 및 장례식 의례''를 선물했다.1393년, 카를로스는 누이 마리를 간디아 공작 알폰소 2세와 결혼시키면서 아라곤 왕가와의 관계를 맺었다. 같은 해, 그는 잉글랜드로부터 셰르부르를 되찾았고, 프랑스 내 영토에 대한 자신의 권리 정리에 대해 프랑스 궁정과 협상을 시작하여,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백작령을 여러 수입과 뇌무르 공작령으로 교환하는 결과를 낳았다. 카를로스 3세는 1406년까지 프랑스 왕가의 왕족으로서 유럽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이후 이베리아 반도로 방향을 전환했다.
카를로스 3세는 아버지의 통치 기간 동안 잃었던 국위 회복과 영내 기반 정비에 힘썼다. 외교에서는 대립 관계에 있던 프랑스, 카스티야와의 관계 개선에 노력했고, 카스티야와는 공주 엘레오노르와의 결혼으로 손을 잡았으며[1], 프랑스와는 1404년에 프랑스 왕가(발루아 왕조)와의 긴장의 원인이었던 노르망디 지방의 에브뢰와 아브랑슈를 누무르 공령과 교환하고, 셰르부르와 샹파뉴의 권리를 연금과 교환하여 관계를 개선했다.[2]
프랑스 내란(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의 대립)에서는 부르고뉴파와 손을 잡고, 1409년 3월 샤르트르에서 열린 부르고뉴공작장 1세와 오를레앙 공작샤를의 화해식에 참석, 11월에 무포 공작과 동맹을 맺었지만, 내란에는 관여하지 않았다.[3]
4. 3. 프랑스와의 관계
에브뢰 가문 출신으로 프랑스 왕가인 카페 가문의 방계 가문인 샤를 3세는 나바라의 샤를 2세 국왕과 프랑스 공주 발루아의 조안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었다. 샤를 2세는 장인인 프랑스의 장 2세와 처남인 프랑스의 샤를 5세와 샴페인 백작령, 프랑스 왕국에 대한 권리, 조안 여왕의 지참금을 놓고 갈등을 벌였고, 이로 인해 나바라는 큰 대가를 치렀다.[1]1393년, 카를로스는 잉글랜드로부터 셰르부르를 되찾았고, 프랑스 궁정과 프랑스 내 영토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정리하는 협상을 시작했다. 그 결과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백작령을 여러 수입과 뇌무르 공작령으로 교환했다. 카를로스 3세는 1406년까지 프랑스 왕가의 왕족으로서 유럽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이후 이베리아 반도로 방향을 전환했다.[2]
카를로스는 누이 조안이 브르타뉴 공작 존 4세와 잉글랜드 왕 헨리 4세와 연이어 결혼하는 등, 그가 주선하지 않은 연합으로부터도 큰 이익을 얻었다.[3] 1402년 조안이 잉글랜드 여왕이 되자 카를로스는 그녀에게 ''잉글랜드 왕의 대관식, 성유 및 장례식 의례'' 필사본을 선물했다.[4]
카를로스 3세는 대립 관계에 있던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에 노력했고, 1404년에 프랑스 왕가(발루아 왕조)와의 긴장의 원인이었던 노르망디 지방의 에브뢰와 아브랑슈를 누무르 공령과 교환하고, 셰르부르와 샹파뉴의 권리를 연금과 교환하여 관계를 개선했다.[2]
프랑스 내란(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의 대립)에서는 부르고뉴파와 손을 잡고, 1409년 3월 샤르트르에서 열린 부르고뉴공작장 1세와 오를레앙 공작샤를의 화해식에 참석했으며, 11월에 무포 공작과 동맹을 맺었지만, 내란에는 관여하지 않았다.[5]
5. 후계 문제
카를로스 3세는 여러 차례 결혼과 동맹을 통해 후계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1401년부터 1402년까지 아라곤의 마르틴 국왕과 셋째 딸 블랑슈의 결혼을 협상했지만, 양국 간의 개인 연합을 원치 않아 성사되지 않았다.[1] 장녀 조안은 푸아 백작 존 1세와 결혼하여 나바라의 유력한 후계자가 되었지만, 1413년에 자녀 없이 사망했다.[1] 1406년에는 넷째 딸 베아트리스가 라 마르슈 백작 제임스 2세와 결혼하면서 카를로스 3세의 재정에 부담을 주었고, 지참금 문제로 아라곤 국왕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1]
1409년 블랑슈가 과부가 되자, 카를로스 3세는 프랑스 왕실과의 인맥을 활용하여 바이에른의 루이 7세 또는 바르 공작 에드워드 3세와의 재혼을 추진했다.[1] 그러나 블랑슈의 시칠리아 상황이 불안정해지자, 카를로스 3세는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1세와 성좌에 사절을 보내 블랑슈를 나바라로 돌려보내거나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1]
결국 블랑슈는 나바라로 돌아와 코르테스에서 상속인으로 확정되었다.[1] 카를로스 3세는 아라곤과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블랑슈와 페르디난드 1세의 차남 존과의 결혼을 추진했고, 1419년에 성사되었다.[1]
5. 1. 아들들의 요절과 후계자 선정
카를로스 3세와 엘레아노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은 모두 요절했다. 1397년에 태어난 카를로스와 1402년에 태어난 루이는 모두 같은 해(1402년)에 사망했다.[1] 왕실 부부는 다음 해에 또 다른 딸 마가렛을 낳았고, 카를로스는 적어도 1412년까지 엘레아노르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을 희망을 품었다.[1]카를로스는 장녀 조안을 푸아 백작 존 1세와, 셋째 딸 블랑슈를 아라곤의 마르틴 국왕과 각각 혼인시키는 등 후계 구도에 힘을 썼다.[1] 1413년 7월, 자녀가 없는 장녀 조안의 죽음으로[1] 카를로스는 새로운 상속인으로 지명된 블랑슈를 위해 더 적합한 상대를 찾게 되었다.[1]
카를로스 3세는 장녀 블랑카(후의 블랑카 1세)를 후계자로 정하고, 아라곤의 왕자 후안(후의 후안 2세)을 결혼 상대로 선택했다.[2] 두 사람은 1419년에 결혼했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손자 카를로스에게 비아나 공국위를 수여하여 부부의 왕위 계승자로 결정했다.[2]
5. 2. 비아나 공 카를로스
1419년 블랑슈 1세와 아라곤의 왕자 후안 2세 사이에서 태어난 손자 카를로스에게 비아나 공작위를 수여하였다. 카를로스 3세는 비아나 공 카를로스를 부부의 왕위 계승자로 결정하는 한편, 후안에게는 결혼 조건으로 가신은 나바라인만 허용하고, 함부로 나바라의 토지를 분배하는 것을 금지했다.[5]블랑슈가 아들 카를로스를 낳자, 국왕은 그를 위해 비아나 공국을 창설하여 이를 기념했다. 블랑슈는 곧 조안이라는 딸도 낳았다. 카를로스 국왕은 블랑슈 이후 두 손주 모두를 상속 서열에 포함시키는 공식적인 의식을 거행했다.
6. 문화 정책과 유산
카를로스 3세는 예술을 애호하여 프랑스에서 화가와 건축가를 초청해 고딕 양식 건물을 지었다. 1423년에는 팜플로나 자치체 간의 분쟁에 개입하여 3개의 자치체를 통합, 팜플로나를 하나의 행정 기관으로 만들었다. 1418년에는 복잡한 나바라의 법률을 수정하여 발포하는 등 여러 정책을 펼쳤다.[4]
6. 1. 건축과 예술 후원
카를로스 3세는 예술을 애호하여 프랑스에서 화가와 건축가를 초청해 수도 팜플로나와 교외의 올리테에 고딕 양식 건물을 지었다. 팜플로나에는 대성당을 개축했고, 올리테에는 기존의 올리테 왕궁을 1401년부터 대대적으로 개수하여 1420년에 완성했을 때는 여러 개의 탑과 정원을 갖춘 왕가의 휴식처로 만들었다. 또한 팜플로나 자치체의 분쟁에 개입하여 1423년에 3개의 자치체를 통합, 팜플로나는 하나의 행정 기관으로 통합되었다. 그 외에도 복잡한 나바라의 법률을 수정하여 1418년에 발포하거나, 지지층인 귀족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등 귀족 위주의 정책을 펼쳤다.[4]6. 2. 팜플로나 통합
카를로스 3세는 팜플로나 자치체 간의 분쟁에 개입하여 1423년 3개의 자치체를 통합했고, 팜플로나는 하나의 행정 기관으로 통합되었다.[4]6. 3. 사망

1425년 9월 8일, 건강하고 쾌활하게 일어난 카를로스 3세는 갑자기 쓰러졌다. 그는 블랑슈를 불렀지만, 그녀가 도착했을 때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같은 날 딸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블랑슈는 어려움 없이 그를 계승했다. 카를로스는 아내 엘레아노르 옆에 판플로나 대성당에 묻혔다.
6. 4. 평가
카를로스 3세는 딸에게 안정되고 번영하는 왕국을 남겼다.[1] 그가 자신을 주로 프랑스 왕자로 여겼는지, 아니면 이베리아 반도의 왕으로 여겼는지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지만, 그가 나바라의 이베리아화가 꾸준히 증가하는 것을 감독했다는 것은 분명하다.[2] 전통적인 역사 기술은 카를로스 3세의 통치를, 아버지의 백년 전쟁 참전과는 대조적으로, 내실을 다지는 시기로 묘사한다. 재정 개혁은 카를로스 2세의 격동적인 통치 이후 왕국에 어느 정도 번영과 사회적 만족을 되돌려주었고, 궁정의 화려함을 더했다. 카를로스 3세는 또한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보였다. 그의 아버지인 "악인" 카를로스와는 대조적으로, 카를로스 3세는 "고귀한 자"라는 별칭을 얻었다.[3]참조
[1]
서적
イエロ
[2]
서적
バード
[3]
서적
清水
[4]
서적
バード
[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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